PART 2

공기 공포의 역사

사진: 국가기록원

대한민국을 덮친 공기에 대한 공포는 2010년대의 미세먼지가 처음이 아니다. 1970년 6월 『경향신문』 기사가 적절히 표현한 것처럼 “기승부리는 현대의 공포”인 대기 오염은 “60년대 초부터 고개를 치켜들기 시작해” 시대에 따라 그 종류와 양태를 바꾸어가며 등장했다. 이에 대한 사회적 반응 역시 오염으로부터 내 몸을 피할 한 줌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일과 공동체의 공기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라는 두 갈래로 늘 나뉘어져 왔다.

1970년 6월 서울지방법원은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공해가 심각해진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는 역사적 판결을 내렸다.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에 사는 30세 최헌민 씨는 자신이 걸어서 출근하는 무악재 고개 옆으로 매일 심한 매연을 뿜는 버스가 지나다니는 것에 분노해 서울지방법원에 해당 버스의 운행 중지를 청구했다. 법원은 삼미운수 등 3개 시내버스 운수회사에 매연정화장치인 가스정화기를 달기 전까지 버스 운행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가처분 소송은 법원이 매연으로 인한 시민의 피해를 최초로 인정한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매일 매연으로 고통받는 일을 “인격권의 침해”로 인정하면서 당시 법원은 대기 오염이 대한민국이라는 정치 공동체가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는 문제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사진: 국가기록원

공해로 인한 피해가 두드러지기 시작하던 1970년대에 바라본 한국의 미래는 더 이상 부국강병의 밝은 전망으로만 차 있지 않았다. 1971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가 한국미래학회와 공동으로 수행한 미래예측 연구는 2000년에는 대기 오염으로 인한 공포가 더욱 심각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3] “자동으로 치료 가능한 병원” “인조육” “교환수 없는 전자교환기”를 비롯한 수많은 과학기술이 눈에 띄게 발전할 2000년대의 한국은 전통적인 공포의 대상이었던 질병, 기근, 노동의 고통이 사라질 ‘낙원’과도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산업화와 더불어 더욱 심각해질 대기 오염이 ‘핵공포’에 맞먹는 새로운 위협으로 등장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었다. 앞으로 공기를 다스리지 못한다면 2000년에는 “산소마스크를 끼고 도시생활을 해야 할 판”이라는 것이 미래학자들의 예측이었다. 심지어 2030년에는 대기 오염 때문에 인류가 멸망할 수도 있다는 비관적인 추측도 나왔다. 이들은 파국을 막기 위해 공기를 더럽히는 공장들에 “공기세”를 부과하거나 “비행기가 도시 상공에 정화제를 뿌리”는 등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대책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세먼지 대응을 위해 추가경정예산이 편성되고 비행기가 바다 상공에 인공강우를 위한 구름 씨앗을 뿌리고 있는 2019년의 모습은 1970년대 미래학자들의 예측과 얼마나 다른 것일까.

사진: 서울사진아카이브

1970년대에는 가정에서 배출하는 대기 오염물질을 줄이기 위한 다양한 대책이 등장했다. 가령 1978년에 서울시는 당시 80만 채의 가정집 중 4만 채만 사용하던 LPG 도시가스의 공급을 50만 채로 대폭 확대하는 계획을 세웠다. 석탄을 LPG로 바꾸는 정책은 불완전연소를 줄여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 대기 오염도를 크게 낮추는 데 기여했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보다 즉각적인 방법을 찾았다. 바로 “탈공해지역”에 새로운 집을 마련하는 방법이었다. 1973년 10월 건축설계가 윤봉원 씨는 잡지 『새가정』에 기고한 글에서 공해를 피해 새로운 주택을 마련할 때 집의 디자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연을 곁들일 수 있는 여유 있는 대지를 구입”하는 일이라고 안내했다. 경제력이 충분하지 못해 새 집을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야 공해를 피할 방법이 없지만, 여유 있는 사람들의 경우 “기계 같은 하루의 생활에 피로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 해볼만한 투자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4]

사진: 서울사진아카이브

도시 거주자 대다수에게 윤봉원 씨가 제안한 “탈공해지역”으로의 도피는 상상하기 어려운 해결책이었다. 그 대신 비즈니스맨들은 공해가 덜한 지역으로 출장을 나갈 때 잠시나마 대기 오염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인천시 동구 송현2동에 사는 비즈니스맨 조룡일 씨의 이야기가 생생하다. 1985년 서울 본사에서 근무하던 조룡일 씨는 제주도로 근무지를 옮긴 후 대기오염의 심각성을 비교 체험했다. 서울에서는 단 하루 만에 때에 찌들던 와이셔츠가 제주도에서는 일주일을 입어도 멀쩡했다는 것이다. 3년 뒤 다시 서울로 돌아왔을 때 조 씨는 대청소를 한 다음 불과 2~3일 만에 집안에 먼지가 가득한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가 새로 산 “고성능 전기청소기”도 사방으로 침투하는 대기 오염을 막아줄 수는 없었다. 조룡일 씨 같은 대도시 시민들은 온몸이 공기의 센서가 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5]

사진: 서울사진아카이브

민주화 운동이 활발하던 1980년대 후반에는 정부의 미온한 환경정책에 대한 불만이 예술작품의 틀을 빌려 뿜어져나왔다. 1984년 7월 극단 ‘연우무대’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공해에 대한 풍자 마당극 <나의 살던 고향은>을 처음 무대에 올렸다. 아황산가스, 매연, 수은 등 유독가스를 의인화한 등장인물들이 서로가 얼마나 독한지를 겨룬다는 내용의 이 창작극은 당시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의 성공을 위해 수도권 대기 정화에 총력을 기울이던 전두환 정권의 미움을 샀다. 이 공연에 등장하는 한 인물이 당시의 국민가요이던 ‘아!대한민국’을 ‘아!공해민국’으로 개사해 부르자(“하늘엔 유독가스 떠있고/강물엔 중금속이 흐르고/도시는 매연으로 뒤덮여/농촌은 농약에 찌들어/공해로 사라지는 곳/아아 공해민국 사양하리라”) 연우무대는 연극 사상 처음으로 6개월 공연정지처분을 받았다. 민주화 운동과 공해추방 운동의 열기가 함께 뜨거웠던 1987년 9월이 되어서야 이 연극은 공해반대시민운동협의회 창립 1주년을 기념해 다시 무대에 올랐다.

사진: 김명곤의 세상 이야기

오염된 대기와 물에 대한 공포로 생활습관을 바꾸는 사람이 늘어나자, 그에 대한 의견도 분분했다. 고려병원 신경정신과장을 역임한 이시형 박사는 오염된 공기와 물쯤은 “좀 먹어도 괜찮다”며 ‘공해 노이로제’를 겪는 현대인들을 달래려고 시도했다. “인간은 그만큼 영리하고 또 강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에 “에스키모가 추위에 잘 견디듯” 도시인도 대기 오염에 적응되어 살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6] 다른 한편에서는 공해에 대해 과도하게 수선을 떠는 것을 공동체를 해치는 일로 여겨 비판하기도 했다. 『경향신문』은 “가족끼리만 정화된 물이나 생수를 먹는" 행위, “농약이 무서워 농촌에 사둔 땅에 무공해쌀을 재배”하는 행위, “공기가 맑은 교외에 집을 마련하고 사는” 행위를 콕 집어 공해에 대한 “개인주의적 몸부림”이라고 칭했다. 이런 공해에 대한 ‘각자도생’의 몸부림이 이기적인 이유는 개인의 수준을 넘어서는 공동의 대응을 상상하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공해에 대해 사람들이 심리적 공황을 느낄 때 사회 전체에는 공동의 대응보다는 개인주의적 행태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마련”이라는 게 『경향신문』의 진단이었다. 공기나 물을 가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를 애초에 만든 산업화와 고도성장이라는 “신기루”를 없애는 일이었다.[7]

사진: 수도원 대기 환경청

1990년대에는 석탄 같은 값싼 연료에서 나오는 아황산가스와 비산먼지는 줄었지만 자동차에서 주로 발생하는 질소산화물이 늘어나면서 오존 농도가 높아졌다. 소위 선진국형 대기 오염으로 불리는 ‘LA 스모그’가 서울에서 발생하여 충격을 주기도 했다. “후진국형 대기 오염에서 벗어나 선진국형으로 진입했다”는 『매일경제신문』의 보도에서는 자동차 보급과 산업화의 결과에 대한 묘한 자부심이 엿보인다. 선진국이라면 한 번쯤 감당해야 할 공포라는 것이다. 이 무렵 대기 오염을 논하는 사람들은 서울의 오염된 공기를 전 세계적인 환경오염의 일부로 인지하게 되었다. 한국의 스모그는 미국의 산성비, 중국의 황사, 남극의 오존층과 나란히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환경 파괴를 상징하는 현상이었다. 그래서 서울의 스모그는 한국에 국한된 공포가 아니라 세계의 종말, 심지어는 “지옥의 묵시록”을 연상시켰다. 대기 오염은 “단순한 특정 지역, 특정 국가, 당시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류를 포함한 모든 지구 생명체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고 있으며 “오늘날 지구촌의 이곳 저곳에서 나타나는 공해는 전쟁보다 더 가공할 공포심을 인류에게 안겨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기 오염은 ‘지구촌’이라는 거대한 공동체에 대한 감각을 일깨우는 역할도 했다.[8]

2000년대 들어 심해진 황사에 대한 공포는 대기 오염이 경계를 초월하는 탈지역적 문제라는 사실을 더욱 확연하게 드러냈다. 중국과 몽골에서 기원해서 서풍을 타고 한국과 일본으로 넘어오는 ‘누런 공포’는 어떤 국가도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과학기술처 장관을 역임한 김진현 세계평화포럼 이사장은 2005년 1월 13일 『한국경제신문』에 실은 칼럼에서 “한국 혼자서 파라다이스를 지킬 수 없다”고 하면서, “중국 근대 성장이 전 지구적 재앙이 되지 않도록 하는 대안의 모색”을 위해 세계적 협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9] 그에 따르면 한국 사람들은 단군 덕분에 지진, 해일 같은 자연 재해의 공포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고, 김치 덕분에 2003년 기승을 부린 사스(SARS) 같은 질병의 공포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재해와 질병을 피했다고 해서 한국이 파라다이스로 남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늘을 덮으면서 들어와 도저히 막을 수가 없는 황사는 한국을 중국 근대화의 “최일선의 피해자”로 만들었다. 김진현 이사장은 황사가 세계적 재앙이 되지 않도록 한국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지구 공동체적 이성과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 NASA

2000년을 전후해 한중일 삼국은 김진현 이사장이 염원한 “지구 공동체적 이성”을 구축하고자 시도하기도 했다. 1999년 1월 13일에는 최재욱 환경부 장관, 시에젠화 중국 환경보호총국 장관, 마나베 겐지 일본 환경청 장관 등 삼국의 환경 담당 장관들이 서울 조선호텔에서 만나 ‘1차 환경장관회의’를 갖고 국제 협력을 강화해 나가자는 내용의 공동발표문을 채택했다. 한중일은 또 2000년부터 황사를 비롯한 여러 대기 오염 물질의 장거리 이동을 추적하는 공동 연구를 시작해서 질산염의 국가별 기여도를 산출해내기도 했다. 동북아를 하나의 ‘호흡 공동체’로 묶어내려는 정치적, 과학적 시도는 20년 동안 계속되면서도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매년 열리는 환경부 장관들의 만남은 각국의 의지를 재확인하는 수준에 그쳤다. 연구를 위한 데이터를 서로에게 제공하지 않는다거나 결과 발표에 반대하는 등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연구가 지지부진해지는 경우도 많았다. 이는 1979년 제네바에서 33개국이 ‘장거리 대기 오염 물질 이동에 관한 협약’을 맺고 공기질 관리에 대한 합의를 이루어낸 유럽의 경험과 대비된다.

사진: 환경부

공기 공동체를 유지하려는 정치적, 과학적 작업이 더디게 나아가는 동안, 황사 속에서 자기 몸을 지키려는 각자도생의 공기 기술이 빠르게 성장했다. 황사가 기승을 부린 2003년 봄에는 공기청정기 보급률이 1년 만에 두 배로 급증하면서 공기 가전 시장이 역대 최대의 호황을 맞았다. 황사와 세균을 막는 특수 마스크도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당시 신세계 이마트 관계자는 “황사철이 다가오는 데다 사스 발병 우려까지 겹치자 황사 전용 특수마스크가 반짝 특수를 누리며 물량이 조기 매진돼 추가 주문을 해놓은 상태”라며 매출 급증에 대한 기대감을 감추지 못했다. 코오롱스포츠는 마스크(mask)와 머플러(muffler)의 합성어인 마프(Maff)라는 이름의 제품을 내놓았다. 야외에서 마스크처럼 착용하면 황사를 막아줄 뿐 아니라 얼굴과 목을 자외선으로부터 보호해주고 꽃가루 알러지 예방에도 효과적이라고 했다. 또 실내에서나 황사가 심하지 않은 날에는 턱밑으로 내려 멋스러운 머플러로 연출할 수 있다고도 했다. 공기 공포는 점점 더 수익 창출이 가능한 형태로 전환되어 왔다.

사진: 코오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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